아침부터 비였습니다. 걷기 코스를 짜 두었던 날, 창밖의 빗줄기는 오후까지 그칠 기색이 없었습니다. 예전의 저라면 숙소에서 휴대폰만 들여다봤겠지만, 이제는 압니다. 비는 여행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그리게 한다는 것을.
비가 다시 그리는 하루
우산을 하나 사서 헌책방으로 갔습니다. 비 오는 날의 헌책방은 세상에서 가장 느린 장소가 됩니다. 책 넘기는 소리와 빗소리뿐인 두 시간을 보내고, 눅눅해진 시집 한 권을 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비 오는 날에만 트는 음반이 있다며 낡은 스피커의 볼륨을 조금 올려 주셨습니다.
비는 여행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그리게 합니다.
점심은 시장 안 칼국수집이었습니다. 비 오는 날의 시장 지붕은 거대한 우산이고, 그 아래의 국수는 평소보다 뜨겁고 평소보다 맛있습니다. 오후에는 찻집 창가에 앉아 젖은 거리를 오래 구경했습니다. 우산들이 지나가는 속도로 그 동네의 하루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기억에 오래 남은 여행에는 꼭 비가 등장합니다. 계획이 지워진 자리에서 우연이 시작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날 산 시집은 아직 눅눅한 채로 책장에 있습니다. 펼치면 그 헌책방의 빗소리가 납니다.